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규/항소이유 보충서 (문단 편집) ==== [[10.26 사건|10·26 혁명]]의 적시성(適時性) ==== 첫째로, [[유신체제]]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한계점에 와 있었읍니다. 우리 민족은 본래 [[자유]]와 [[평화]]를 사랑하는 우수한 민족입니다. [[일본 제국|일제]]의 압제에 항거하여 [[3.1운동]]까지 일으킨 민족이고 [[안중근|안중근 의사]] 같은 훌륭한 분을 낸 민족입니다. 이러한 역사 속에 살아온 우리 [[국민]]이 [[유신체제]] 같은 혹독한 [[독재]]를 용납할 리가 없읍니다. [[유신체제]] 7년 동안 끊임없이 압제와 독재에 항거하여 왔읍니다. 본인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구속된 사람을 많이 풀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[[긴급조치#s-2.9|긴급조치 9호]]로 구속되는 학생의 수는 늘어만 갔읍니다. 안타까운 일이었읍니다. 제적학생수는 더 많았읍니다. 그 제적학생들은 다른 대학에 새로 입학할 수도 없었읍니다. 완전히 대학에서 추방하도록 박대통령 자신의 지시로 방침까지 세워놓고 있었읍니다. 그러나 백번 잘못을 저지른 [[국민]]을 백한 번 용서하는 것이 정부의 태도여야 한다고 믿은 본인은 당시 박찬현 문교부장관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느냐면서 제적된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키자고 세 번씩이나 간곡하게 애소도 해본 일이 있었읍니다만 복교시킨 뒤에 학생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면 자기가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을 당한 일도 있었읍니다. 어떻든 이와 같은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[[국민]],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[[부마민주항쟁|부산·마산사태]]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. [[부마민주항쟁|부마사태]]는 그 진상이 일반[[국민]]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읍니다. 특히 [[부산]]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읍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읍니다.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읍니다.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, 정책에 대한 불신,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읍니다. 이러한 사태는 본인이 당시에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읍니다. [[국민]]들의 [[유신체제]]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. 둘째로,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여 박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몰라 [[국민]]의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고 있었읍니다. 본인이 부산사태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읍니다.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읍니다. 부산사태는 체제반항과 정책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되겠더라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.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"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. [[자유당]] 때는 [[최인규]]나 [[곽영주]]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"고 역정을 내셨고, 같은 자리에 있던 [[차지철]]은 이 말 끝에 "[[캄보디아]]에서는 [[킬링필드|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]] 우리도 데모대원 1~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"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. 그런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읍니다. 박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. 그는 [[군인]]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. 더구나 [[10월 유신]] 이후 집권욕이 [[애국심]]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심지어 [[국가]]의 [[안보]]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. [[이승만]]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박대통령은 이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. [[4.19]]와 같은 사태가 오면 [[국민]]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[[국민]]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읍니다. 그런데 [[4.19]]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, 아니 [[부산]]에서 이미 [[4.19]]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읍니다. 셋째로,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제적으로도 고립되고, 특히 [[미국]]은 대한정책을 바꾸게 될 충분한 가능성도 있었던 것입니다. 그렇게 될 경우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읍니까? 결국 본인은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10·26 혁명을 결행하였던 것입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